최준문 동아그룹 설립자께서는 1920년 1월 21일(음) 태어나시고 1985년 6월 21일(양) 세상을 떠나셨다.
그 당시 한국 남성의 평균수명인 65세에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가 적어도 십 년은 더 사실 것으로 생각했었다.
돌아가시기 5일 전, 휴스턴에서 리비아 대수로 공사 회의를 마치고 귀국한 나는, 아버지가 요즘 건강이 좀 안 좋으신 정도로 알고 있었다.
5년간의 투석으로 이미 많이 쇠약해지신 상태였다.
입원해 계신 순천향병원으로 가서 의사를 만났다.
그의 입에서 “임종을 위해 이제 집으로 모시는 게 좋겠다”라는 말이 나왔고 나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가족 주치의의 얼굴이 이그러졌다.
그가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심장에 바로 주사를 꽂는 시술을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침상 옆 허연 대야에 핏물만 가득 고였다.
이미 의식이 거의 없으신 아버지를 뵈니 가슴이 미어졌고, 장충동 집으로 모시고 올 수밖에 없었다.
안방 이불 위에 반듯이 누워계신 아버지 옆에서 “주 안에 있는 나에게”라는 찬송을 눈물로 밤새 불렀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가난이 원수니까 반드시 이 가난에서 벗어나 돈을 벌어보자는 결심을 하셨다.
원래는 풍족한 집안이었으나, 할아버지께서 당시 빚보증을 잘 못 서서 모든 가재도구를 압류당했다.
솥뚜껑까지 빼앗겨서 며칠간 밥을 지어 먹을 수 없었다는 말씀도 하셨다.
초등학교 때는 점심시간에 수돗가에 가서 수돗물로 배를 채우시는 날도 많았다.
하루는 잘사는 친구 집에 찾아가서, 친구의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하셨다.
“내가 이 집 측간에서 변을 떠 가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분은 어린 학생을 기특하게 여겨 승낙하셨고, 아버지는 바로 또 다른 친구의 부모에게 가셨다.
“제가 이 밭에 거름을 대도 되겠습니까?”
이렇게 양쪽 집에서 수익을 잡아 어린 시절 점심을 해결하셨다.
아버지는 천성이 부지런하고 인물이 출중하셨다.
처음 보는 사람은 누구나 호감을 느낄 정도로 친화력이 있으시고, 유머 감각도 많으셨다.
누구와 약속을 하시면 꼭 15분 전에 먼저 가서 상대방을 기다리셨다.
내가 어릴 때에는 아버지가 건설 현장을 갈 때 나를 데리고 가시는 일이 많았다.
건설 회사는 현장 중심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하루에도 서너 군데를 수시로 방문하셨다.
내가 자동차 옆자리에 타면 그 두꺼운 왼손으로 내 오른손을 가만히 잡고 계신다.
참으로 지극한 사랑을 많이 받았던 시절이었다.
아직도 아버지의 따스한 온기가 내 오른손에 남아있는 것 같다.
아버지는 20세 되던 1940년, 임춘자 여사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는데 내가 막내다.
11년 만에 낳은 자식이라 특별히 부모님께서 더 귀여워하셨다.
당시 사업을 하는 분들이 가족 관계가 좀 복잡한 경우가 많은데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머니가 낳은 자식 외에도 네 명의 자식이 더 있는 것을 나중에 알았는데 딸 셋과 아들 하나이다.
이런 문제로 어머니가 평생 속을 썩이셨다.
아버지는 원래 토건업을 배웠는데 어머니와 결혼을 하면서, 외할아버지가 하시던 충남 토건을 발판으로 동아건설을 세우셨다.
설립 일자는 1945년 8월 20일이다.
주로 충남 지방에서 일하셨고, 기반이 좀 잡히자 정미소도 하시고, 이북에서 목재사업을 크게 하시던 중 6, 25가 났다.
6, 25 며칠 전에 어머니가 현장 근로자들의 밥을 해주다가, 과로로 무릎을 다치셨다.
두 분이 치료차 어머니의 고향인 논산으로 내려왔는데 바로 전쟁이 터진 것이다.
어머니는 가끔 “그때 내 무릎이 아버지를 살렸다”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이미 자본가 계층에 속한 아버지는 공산 치하에서 몇 년간 도피 생활을 하셨다.
몇 번 인민군이 찾아 왔으나 그때마다 담을 넘어 탈출해서 위기를 넘기셨다.
어느 날, 남으로 내려가던 중 인민군의 불심 검문에 걸렸는데 소지품에서 반짝이는 거울이 나왔다.
이 거울로 햇빛을 반사하여 미군 비행기에 신호를 보낸다는 의심을 받았다.
미국의 간첩이라는 혐의로 인민재판에 넘겨졌다.
그 당시 인민재판은 주위에 모여있는 사람들이 '죽여라' 하고 소리치면 맞아 죽거나 총살되곤 했다.
아버지의 차례가 되었다.
이때 나무 탁자 중앙에 앉은 재판장이 아버지에게 “최준문 동무 아니요. 나를 모르시겠소?” 하는 것이었다.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옆 동네 박수무당이었다.
“동무들, 이 최 동무는 사업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우리 같은 인민에게 잘해준 사람입니다.
악덕 지주는 아니고 미국 간첩도 아니오.” 하고 그 자리에서 풀어주었다.
“그때 왜 그가 풀어 드렸을까요?”라고 여쭤보니 “아마 공사판에서 굿 끝나고 넉넉히 돈을 준 것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런저런 위기를 넘긴 후 전쟁이 끝나면서 사업을 더욱 확장했는데, 1957년에는 서울로 회사를 옮겼다.
이후 5, 16이 나고 건설 붐이 일면서,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이미 평판이 높았던 아버지는 많은 공사를 수주하게 되어 동아건설이 그룹으로 발전하는 토대를 이루셨다.
박정희 대통령도 ‘현대의 정 회장과 동아의 최 회장이 제일 부지런하고 일을 잘한다’라고 하셨다.
JP와는 그분의 선친 때부터 아버지의 고향인 공주에서 집안끼리 친밀한 사이였다.
나도 아버지를 모시고 JP의 청구동 자택에 몇 번 갔었다.
두 분이 의기가 잘 투합하는 느낌이었다.
동아건설은 특히 간척공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동진강과 섬진강 간척 사업 등은 화란의 기술자들도 와 보고 기술상으로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동아의 기술로 완공시킨 쾌거였다.
바지선으로 돌을 싣고 바다에 빠뜨리는 방법은 아버지가 며칠간 고심하여 연구하신 새로운 방법이었다.
아버지는 토건 회사의 성공비결이 일일 현금 지급이라고 하셨다.
토건 회사는 근로자들이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데, 그들에게 그날그날 정산을 하고 현금 지급을 해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하셨다.
당시 어머니가 도시락 3개를 새벽에 싸 주시면, 온종일 근로자들과 같이 일하면서 그 도시락을 다 드시고, 저녁에 또 집에서 식사하셨다.
며칠간 장화를 못 벗을 때가 많아서 이때 생긴 무좀이 나중에도 잘 낫지가 않았다.
이 시절에는 아버지의 얼굴을 한 달에 한두 번밖에 볼 수 없었다.
이렇게 회사가 발전하던 중 1969년에 국영기업이었던 대한통운을 인수하게 되었다.
이로써 동아가 건설 회사에서 한국의 재벌그룹으로 비약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계열회사가 20여 개 정도 되었다.
당시 정부는 대한통운과 대한항공을 민영화하려는 계획을 은밀히 추진하고 있었다.
두 회사 모두 적자가 크고 방만하게 운영되는 국영기업이라 선뜻 인수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정부에서 아버지와 한진의 조중훈 회장님에게 인수 의사를 타진했다.
아버지에게 두 회사 중 하나를 먼저 고르라고 했고, 대한통운을 선택하셨다.
나중에 내가 왜 대한항공을 선택하지 않으셨냐는 질문에 “대한항공이 발전성은 있겠지만, 항공사고가 나면 수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을 텐데 그게 걱정이었다”라고 하셨다.
통운을 인수하신 지 1년 만에 만성 적자기업을 흑자로 돌리는 사업능력을 발휘하셨다.
1970년대 초에 아버지는 미국 GM과 합작하여 자동차 생산 공장을 만들려고 하셨다.
한국의 GM 대표와 이해각서를 사인했는데 대우가 갑자기 뛰어들어 경쟁하게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대우가 낙점되었다.
이런저런 과정에서 과로를 하셨는지, 아버지는 고혈압으로 치료를 받기 시작하셨다.
어느 날 문을 열려고 방문 손잡이를 잡으려는 순간, 갑자기 핑 돌면서 어지럼증을 느낀 후 난생처음으로 혈압이라는 것을 재어 보셨다.
위 혈압이 190이고 아래가 120이었다.
의사는 회사 일을 즉시 중단하고 요양을 하시라고 권했다
.
동경의 ‘순천당’ 병원에 유명한 고혈압 전문 의사가 있어서 그곳에서 치료가 시작되었다.
몇 달간 철저한 식이요법을 하셨는데 반찬이 사과와 간을 하지 않은 삶은 감자 정도였다.
아버지는 2달 이상을 매일 철저한 무염식을 하면서 혈압을 내리고 건강을 회복하셨다.
이후 마침 사우디 건설 붐이 일어났다.
아버지는 직접 사우디의 담맘, 리야드 등 현지에 가셔서 공사 수주를 하시며 몇 년간 다시 적극적으로 회사업무를 보셨다.
당시 나는 미국에 있을 때였다.
사우디에서 미국으로 오신다는 연락에, 샌프란시스코 공항으로 나가서 아버지를 뵈니까 좀 피곤해 보이셨다.
생각해 보니 그때 연세가 지금 나의 나이보다 한참 젊으신 57세이셨다.
한국으로 돌아가신 후 다시 과로하셨는지, 혈압이 조정이 안 되고 신장에 문제가 생기는 부작용이 발생하였다.
이후에는 대부분 업무를 장남인 최원석 회장이 맡아서 하게 되었다.
나는 신장치료로 유명한 독일 병원을 알아보았다.
당시 서독의 작은 도시 '한뮨덴'에 큰 신장병원이 있었는데, 거기서 40여 일 치료하시는 동안 내가 모시고 있었다.
그곳 교포인 신장 전문의 박모 교수님 가족이 친절히 보살펴 주었는데 둘째 아들도 신장 전문의였다.
그러나 큰 효과는 없었고 결국 텍사스의 샌안토니오 병원에서 신장혈관 연결 수술을 하게 되었다.
혈관 By Pass 수술은 허벅다리의 정맥을 떼어내어, 신장기능이 조금 남아있는 오른쪽 신장에 연결함으로써 신장의 기능을 회복시키는 큰 수술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텍사스의 샌안토니오로 갔다.
수술은 9시간이 걸린 대수술이었는데 수술결과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약간의 기능이 남아있던 오른쪽 신장이, 허벅다리에서 이식한 정맥을 통해 공급되는 혈액으로, 다시 정상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장기능을 측정하는 '크레아틴' 수치가 피검사에서 정상으로 나오니 아버지는 대단히 기뻐하셨다.
십여 년간을 그 수치에 너무나 일희일비했기 때문이다.
또 거의 안 나오던 소변이 술술 나와서, 침대 아래 보이는 비닐통에 노랗게 모였다.
옆에 있던 나도 환호를 했다.
아버지는 혈관 By Pass 수술 전에 신장이식 수술도 생각하셨다.
신장이식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이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은 사람을 찾던 중, 당시 모투자은행의 변 부사장님을 수소문하여 만났다.
그분은 수주 변영로 선생님의 아드님이었는데 나의 여러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 해주셨다.
이식 수술을 받은 지 10년 가까운데 건강하게 잘 생활하고 계셨다.
이분을 보시면 아버지가 대단히 부러워하실 것 같았다.
가족 중에는 내가 혈액형이 같고 조직의 티슈도 잘 맞았다.
나는 수술을 하신다면 내 신장을 드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주치의 선생과 상의를 하셨는데 의사가 이식을 권하지 않았다.
이미 전체적인 혈관 상태가 이식을 성공적으로 하기에는 위험부담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도 나의 신장을 이식받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으셨던 것 같았다.
내 마음 한구석에도 ‘나의 신장을 드린다면 과연 나는 무슨 부작용이나 문제가 없을지' 하는 걱정으로 내심 불안하기도 했었다.
아버지는 샌안토니오에서 혈관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중환자실에 일주일 있은 후 입원실로 올라오시게 되었다.
정맥을 길게 떼어낸 왼쪽 허벅다리에 stitch(바늘 꿰맨 자국)가 10여 개, 개복 수술을 한 배에 35개, 모두 50개가 넘는 호치키스 심 같은 철사 묶음이 있었다.
2주 후에 이것들을 모두 제거하고 3주 후에 퇴원하시면 되는 일정이었다.
나는 아버지 몸에서 stitch를 모두 제거하면 한국으로 먼저 돌아가겠다고 말씀드렸고, 아버지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리비아 공사의 발주처 사람들도 그때쯤 한국에 올 예정이었다.
2주가 지나 수술 부위에 있는 stitch를 모두 제거했고 혈압도 안정이 되었다.
나는 이제 한국에 돌아가 보겠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그런데 의외로 1주일 더 있다가 같이 귀국하자고 하셨다.
먼 이국땅에서 큰 수술을 하시고 심신이 무척 힘드셨던 것 같았다.
물론 영어 통역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건강을 다루는 병원에서는 끝까지 자식과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수술도 대 성공이고, 이제 수술 자국도 다 아물었으니, 서울에 빨리 가서 회사 일을 봐야 하는 것을 왜 이해 못 하시나 하는 좁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서운해하시는 병실의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서울로 향했다.
참으로 불효막심하고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아버지는 타고난 건강 체질이셨다
너무 건강에 자신이 있어서 혈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50세가 되어서 처음 아셨다.
소싯적에 씨름을 잘하셔서 시골에서 상도 타셨고, 어린 나를 붙잡고 조금 가르쳐 주신 기억도 있다.
또 내 양쪽 겨드랑이를 붙잡고 위로 번쩍 들어 올려서. 내가 천장에 손을 댈 수 있도록 같은 동작을 여러 번 반복하셨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골프를 좋아하셨다.
장충동 집 마당에 연습 망을 설치해 놓고 열심히 드라이버를 연습하셨는데 천으로 된 과녁이 여러 번 찢어지도록 열심히 하셨다.
보기 플레이 정도 하셨는데 건강하실 때는 거리가 250야드 정도 나갔다.
당시 드라이버 헤드는 감나무로 만들었고 채의 길이는 지금보다 5인치 정도 짧았다.
영하 17도의 어느 날, 한양 칸트리에 나간 기억이 나는데, 뜨거운 물이 들어있는 작은 손난로를 내가 주머니에 넣고 있다가, 손이 시렵다고 하시면 얼른 드렸다.
어느 초겨울 아침, 첫 팀으로 나가서 1번 홀 아주 긴 퍼트가 들어가니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서리가 하얗게 앉은 퍼팅그린에 공이 구른 자국 20여 미터만 가늘게 한 줄로 보였다.
아버지는 골프를 가자고 하실 때 이렇게 먼저 물어보셨다.
'“오늘의 스케줄은?”
처음에 사실대로 오늘 좀 일이 있다고 몇 번 말씀드렸더니 “그러면 일을 보라”고 하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혼자 골프를 가셨다.
이후에는 웬만하면 별 스케줄 없다고 말씀드렸고 그제야 골프를 같이 나가자고 하셨다.
아버지를 모시고 골프를 가는 일보다 중요한 일이 없다는 것은 돌아가신 후 철이 들면서 알게 되었다.
신장 혈관 by pass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으시고 2년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의 신장기능이 갑자기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식이요법을 잘 안 하셨는지, 아니면 혈관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결국 혈액 투석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병원에서 투석을 하셨는데, 몇 달 뒤에는 집에 투석기기를 준비하고 간호사가 와서 하게 되었다.
투석을 시작 하고 일이 년은 별로 힘들어하지 않으셨고, 가까운 8군 골프장에도 종종 나가셨다.
거기에 미스 최라는 40대의 캐디가 있었는데 우스갯소리도 같이 하면서 혈액 투석을 잠시나마 잊으시고 유쾌하게 골프를 즐기셨다.
8군 골프장은 페어웨이 거리는 짧은데 중간에 그늘 집이 없고, 쉴만한 곳도 별로 없었다.
어느 홀 중간에 작은 벤치가 하나 있는데 등 받침이 없었다.
골프를 치다가 그 벤치가 보이면 내가 먼저 의자에 등을 보이며 반대로 앉으면, 아버지가 앉으시면서 내 등에 기대셨다.
건강이 안 좋으신 아버지께 해 드린 일이라고는, 겨우 등받이 역할 잠깐이 전부였다.
등으로 느껴지는 병고의 무게에 마음이 아팠다.
'누가 내 신장을 고쳐 주는 사람이 있으면 모든 재산을 다 주고 싶다'는 말씀도 몇 번 하셨다.
아버지는 신장 투석을 본격적으로 하면서 장충동을 집을 떠나 한남동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거기가 공기도 더 좋고 주위 보살핌도 필요해서 내린 결정이었으나 어머니와는 더 소원해지셨다.
내가 한남동 집에 가서 투석하실 때 다리를 주물러 드리면 불과 5분도 안 돼서 이제 고만하라고 하신다.
까맣고 울퉁불퉁한 다리 피부는 신장이 노폐물을 거르지 못해 생기는 부작용이다.
가려움증도 심해져서 여기저기 긁으니 정강이 쪽에 딱지가 다닥다닥 붙었다.
투석 후 같이 가벼운 식사를 끝내면 이제 바쁜데 가보라고 하신다.
주저하는 마음으로 대문을 나서면 한참을 집 마당에서 바라보고 계신다.
혈압이 안 좋아지면서 아버지는 대전에 '공산학원'을 설립하셨다.
공산(公山)은 아버지의 호인데 노산 선생님이 지어 주셨다.
기술자가 많은 나라가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당시 아무도 하지 않는 공업고등학교를 개교하셨다.
IMF를 겪으며 동아가 무너졌어도 공산학원이 남아있어 죄송한 중에도 일말의 위안이 된다.
아버지는 언론에 요란하게 나는 것보다 조용하게 내실을 다지는 사업 스타일을 더 선호하셨다.
주위 분들은 아버지를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사업가’라고 평했다.
간혹 언론에서 아버지의 성격이나 업무 스타일에 관해 추측성 기사가 나올 때가 있었다.
‘제5공화국’이라는 드라마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보안사령관일 때 만나는 장면 등은 평상시 아버지의 분위기와 달랐다.
아버지는 성격이 치밀하면서도 융통성이 많으셨다.
늘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며 타당한 말에는 귀를 기울이셨다.
하지만 어설피 잘 모르면서 아는 척 했다가는 질책을 받았기에, 비서실 직원들도 늘 자료를 챙기고 공부하는 분위기였다.
‘신언서판’(身言書判) 이라는 사자성어를 간혹 쓰셨는데, 사람은 용모, 말, 글 그리고 판단력이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또 사람이 법망은 피해갈 수 있어도 천망은 피해갈 수 없으니, 모든 사람을 선의로 대하고,역지사지의 자세로 생각하라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
아버지는 인내심이 대단하셨다.
정치적인 문제로 회사가 불이익을 당할 때 내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하면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이 참는 것이고,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것은 참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이 말씀을 대전 공산학원 로비에 있는 아버지의 흉상에 새겨 놓았다.
돌이켜 보면, 내가 이 말씀을 따르지 못할 때가 많았다.
사업을 하시면서 위기도 있었다.
1962년 동명 증권을 하실 때 갑자기 증권파동이 났었다.
몇 달 사이에 몇십 배 오른 주가들이 갑자기 폭락하여 휴짓조각이 되었다.
증권회사는 빚더미에 쌓이고 투자자들이 자살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결국, 동명 증권을 처분하게 되었는데 이때가 가장 힘들었을 때였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책을 읽으시는 방법은 독특했다.
항상 책의 서문과 차례를 먼저 꼼꼼히 읽으셨다.
저자가 왜 책을 썼는지, 책의 내용이 전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먼저 숙지한 후 책을 읽어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다.
이후 나도 책을 읽을 때 서문과 차례를 먼저 정독하는 습관이 생겼다.
장충동에서 모시고 살던 어느 날 아침, 나를 조용히 부르셨다.
무슨 일인가 하고 2층 집무실로 올라갔더니, 물기가 비치는 신문지 같은 종이에 길게 둘둘 말려 있는 것을 펴보라고 하신다.
호기심에 조심스레 펴보았더니 인삼인데, 머리 부분이 길고 굵은 매듭이 중간중간에 여러 개 있었다.
나는 이게 혹시 산삼이 아닌가 싶었다.
역시 그것은 산삼이었고, 설악산에서 심마니가 막 캐온 것이라며 나에게 먹으라고 반을 주셨다.
나는 그 귀한 것을 먹고 다음 날 아침 그만 설사를 했다.
사업한답시고 술을 많이 마시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참으로 멍청한 아들이었다.
또 항상 마음이 아픈 가족 문제가 있었으니, 아버지는 거의 평생을 어머니와 화목하지 못하셨다.
물론 귀책 사유는 아버지에게 있었기에, 늘 한 수 접고 충돌을 피하려고 노력하셨다.
두 분을 모시고 살면서, 나는 아버지의 인내의 향내를 느낄 때마다 마음이 쓰렸다.
그렇다고 내가 어머니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아버지는 음악을 좋아하셨는데 특히 국악을 많이 들으셨다.
오십이 넘으셔서 가야금을 배우셨는데, 왼손가락 끝에 누렇게 굳은살이 박이도록 몇 년을 연습하셨다.
내가 중학교 때 기타를 치면서 팝송을 부르면 가사 내용은 잘 모르시지만, 듣기 좋다고 칭찬해 주셨다.
편찮으시기 전에는 장충동에서 어머니와 새벽기도를 다니실 때도 있었다.
찬송가 469장 "내 영혼의 그윽이 깊은 데서"를 좋아하셨다.
2절 가사 “나의 보화를 캐내어 가져갈 자, 그 누구랴 안심일세”라는 대목에서는 항상 웃으셨다.
1980년 환갑잔치 때 부르신 노래는 '나그네 설움'과 '번지 없는 주막'이었다.
다음 날 아침, 무슨 말끝에, 아주 오래전 당신을 사모하던 어느 여성의 이름을 지나가는 말처럼 나에게 언급하셨다.
그 여성이 누구였는지 묻고 싶었으나 묻지 못했다.
용모가 출중하시고, 유머가 많으시고, 인정도 많으신 아버지...
서독의 작은 도시 ‘한뮨덴’에 있는 신장 전문 병원에 입원 해 계실 때 늘 녹음기로 즐겨 들으시던 곡이 있었다.
‘천안 삼거리’라는 노래인데 2절의 "삼수나 갑산길 멀고도 먼 길을~" 부분을 특히 좋아하셨다.
40여 일 내내 한뮨덴 시골 산책로를 아버지와 같이 걸었다.
아직도 골프장 작은 벤치에 앉아, 내 등에 기대시는 아버지의 무게가 느껴진다.
아버님, 죄송합니다...
아버님 37주기에, 원영 올림.
노래 '풍수지탄'
http://www.youtube.com/watch?v=2XIbeFM7G2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