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타민 C를 다량 복용하는 분들이 많다.
다량 복용은 하루 약 3000mg이상을 의미하는데 국내 비타민 C 전도사인 이왕재 박사는 하루 15.000mg 이상을 복용한다.
반면 의학적으로 확실히 입증된 바가 없고 부작용도 있을 수 있으니 다량 복용은 조심해야 한다는 의사들도 있다.
이와 비슷한 논쟁이 이미 50여 년 전에 미국에서 있었으며 그 중심에 라이너스 폴링 (Linus Paulling) 박사가 있었다.
라이너스 폴링(1901~1994)
폴링 박사는 노벨 화학상과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미국의 물리화학자이다.
그의 일생은 파란만장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그러나 친구의 화학 실험실에서 물질의 변화에 일생을 건다는 신념으로 공부를 시작하여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핵 반대 사회 운동을 주도하여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하게 된다.
한 사람이 노벨상을 단독으로 두 번 수상한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으며 이후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
그가 학자로서 명성을 쌓은 후 사회 활동을 할 때 미국은 매카시 선풍으로 극우주의자들이 득세하여, 사회주의 성향의 인사들을 탄압하였고 폴링 박사도 피해를 입었다.
교수직에서 해임되고 해외여행도 하지 못하였다.
이런 일들을 겪은 후 1965년, 그의 나이 64세부터 비타민 연구를 시작한다.
폴링은 정신분열증에 다량의 비타민이 뇌에서 건강의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는 실험 결과를 접하고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개념이 신체의 다른 부분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이를 분자교정의학(Orthomolecular Medicine)이라 명명하였다.
그는 5년간의 연구 끝에 사람들이 비타민 C를 더 많이 섭취하면 건강이 향상될 것이란 생각으로 1970년 가을 <비타민C와 감기>를 저술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논문은 사이언스 잡지에서 퇴짜를 맞았고, 미국 식품의약국은 ‘비타민 C가 감기를 예방하거나 치료한다는 과학적 증거는 없다'고 발표하였다.
여기에 굴하지 않고 폴링 박사는 대중들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 알 권리를 가지고 있다며 책과 방송을 통해 직접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1970년대 중반에 많은 미국 사람들이 다량의 비타민 C를 섭취하게 되었다.
폴링 박사는 삶의 전반을 화학 교과서 저술과 평화 운동으로 보냈다면 후반은 인류건강을 위한 비타민 C에 바쳤다.
그런데 그는 의사가 아니었으며, 당시 권력자들에게 미운털이 박혀 있었다.
의사들은 의사가 아닌 사람이 건강에 대해 말하는 것을 싫어했으며, 정부에서는 그의 대외 활동을 노골적으로 제한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가장 힘들고 충격적인 아픔을 겪게 되는데 바로 아내의 죽음이었다.
그의 아내는 1970년경 위암 판정을 받았는데 폴링 박사의 소신대로 다량의 비타민 C를 복용하여 회복되었다.
그런데 1981년 그녀의 암은 재발했고 비타민 C가 이번에도 역시 그녀를 치료 해주리라는 간절한 기대를 저버리고 그해 말 세상을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그 무렵 미국 국립 암연구소는 비타민 C가 암 치료에 도움이 되는가 확인하기 위한 임상실험을 실시했으나 효과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의학계는 이를 비타민 C에 대한 최종 답안으로 받아들였지만, 폴링은 그 실험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고 암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소신을 거두지 않았다.
이후 시간이 많이 지나면서 생화학분야의 연구가 활발해지자 비타민 C가 손상된 세포의 유해산소를 제거하는 항산화제로서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즉 비타민 C의 대사 반응에 대한 중요성, 생존 기간을 늘려주는 효과, 독성을 감소시키는 효과들이 속속 발표되었다.
90살이 된 폴링은 전립선암으로 수술을 받은 후 많은 양의 비타민 C, 싱싱한 야채와 과일을 섭취하며 스스로 치료하였으나 1994년 94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천재적인 생화학자였으며 불굴의 평화주의자, 그리고 인류의 건강을 위해 비타민 C가 필요하다는 확신으로 그 보급에 평생을 바쳐온 폴링 박사의 업적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높이 평가되고 있다.
현재 모교인 오리건 주립대학에는 라이너스 폴링 연구소(Linus Pauling Institute)가 설립되어 지금도 비타민과 미량 원소들을 활발히 연구하고 있다.
한편 비타민 C의 발견과 효능에 대해 폴링 박사보다 먼저 많은 공헌을 한 두 사람이 있었다.
센트 죄르지 알베트(1893~1986)
알베트박사는 비타민 C의 아버지다.
아스코르브산(Ascorbic acid= 비타민 C)을 발견하였으며, 근육의 연구 등 생물학적 연소에 관한 논문으로 1937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헝가리의 생화학자인 그는 부다페스트 대학 재학 중 생체의 구조에 대한 조직학적인 연구를 발표하였으며 1930년 부다페스트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어찌 보면 평범한 관찰로 비타민 C를 발견했다.
"내가 색깔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비타민 C를 발견한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색깔을 좋아한다. 색깔은 나를 어린아이처럼 즐겁게 만든다.
나의 첫 번째 의문은 왜 바나나가 상하면 껍질이 갈색으로 변하는가였다."
그는 식물이 함유한 폴리페놀이라는 화합물이 산소와 작용하면 일종의 딱지인 갈색이나 검은색 물질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 발견을 통해 앨버트 박사는 그다음 단계로 “식물은 두 종류가 있다. 상하면 검게 변하는 것과 상해도 색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
그렇다면 왜 상해도 색이 변하지 않는 식물이 있는가?”
바로 그 식물 안에 당 같은 화합물인 비타민 C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물이 지닌 비타민C는 폴리페놀이 산소와 작용해서 산화되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에 갈색이나 검은색의 보호 물질이 필요 없었다.
그래서 겉이 상했을 때 색이 변하는가(바나나) 변하지 않는가(오렌지)를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과일들의 비타민 C 함유량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박사는 비타민 C 결핍 질환(괴혈병)을 치료하려면 합성 비타민 C만으로는 충분한 효과가 없고, 자연식품에 있는 완전한 비타민 C 모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1955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시민권을 받았고 재정적인 어려움에도 암과 화학물질의 변화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여 유해산소에 대한 이론도 정립했다.
어윈 스톤(1907~1984)
스톤 박사가 없었다면 폴링 박사의 비타민C에 대한 연구와 보급도 없었을 것이다.
스톤 박사가 확고한 신념으로 폴링 박사에게 비타민C의 효능을 인식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다량의 비타민 C가 인체에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을 처음 한 사람이다.
즉 인간은 자체로는 비타민 C를 만들 수 없는 동물이기 때문에 괴혈병을 막는 정도 보다는 훨씬 더 많이 복용해야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방면의 연구를 계속하여 1934년 월러스타인 연구소장으로 효소와 화학변화의 특허를 26개나 획득했다.
이후 과일에 비타민 C를 투입하여 과일을 오래 보존하는 방법도 최초로 개발 하였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다량비타민 복용의 필요성은 당시 거의 각광을 받지 못했다.
연구 논문도 큰 병원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학술지에도 실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보낸 논문을 그 들은 읽어 보지도 않았다'고 분개했다.
그러던 중 1966년 폴링 박사의 세미나에 참석, 폴링에게 그의 주장을 설파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미 두 번의 노벨상 수상 등으로 유명 인사가 된 폴링 박사와 같이 비타민C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게 된다.
스톤 박사는 비타민 C의 효능에 대한 확신을 그의 몸으로 직접 실험하는 사건이 있었다.
부인과 같이 사우스 다코다의 작은 도시에서 운전 중 마주 오던 차가 중앙선을 넘어 그의 차와 충돌하는 큰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심각한 상태에서 입원한 두 부부는 정신이 들고부터 하루에 50g의 비타민 C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그의 부인이 먼저 회복되어 간호사 역할을 하였고, 스톤 박사는 입원 후 다섯 번의 수술을 받았다.
여기저기 무수한 골절상을 입은 그는 의사가 놀랄만한 빠른 회복을 보였는데 비타민 C 덕분이라 생각했다.
석 달 만에 완쾌한 그는 이후 그의 삶을 비타민 C에 대한 연구에 바치기로 결심하게 된다.
스톤 박사는 정신분열증에 다량의 비타민이 도움이 되는 현상을 확인하고, 비타민이 뇌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들 균형이 깨지면 질병이 된다고 믿었다.
그는 1972년에 그의 대표적인 저서 <Healing Factor>라는 책을 써서 비타민 C 다량 복용이 여러 질병에 큰 도움이 된다는 주장을 발표했다.
알베트 박사와 폴링 박사가 그 책에 추천사를 썼다.
한국의 비타민 C 다량 복용의 연구와 보급은 위에 언급한 서울대 해부학과 교수였던 이왕재 박사가 오래전부터 선구자적 역할을 했고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왕재 박사
또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하병근 교수도 비타민 C에 대한 탁월한 연구를 했으나 불의의 사고로 안타깝게 일찍 별세하였다.
하병근 교수
이러한 분들의 연구와 공헌에 힘입어 비타민 C의 효능이 점점 더 많이 알려지고 있다.
다른 동물과 달리, 우리 인간의 몸이 무슨 이유로인지, 언제부터인지 만들 수 없게 된 비타민 C.
이에 대한 비밀이 점점 더 풀리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미래의 유전자 가위가, 우리 인간도 스스로 비타민 C를 다시 만들 수 있게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