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치적 상황은 나라가 어렵사리 도달한 객관적 위상과는 어울리지 않게 천하대란(天下大亂)을 방불케 하고 있습니다.
내년 총선을 마치 일대회전(一大會戰)으로 맞이하려는 비장감과 결기로 가득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회전(會戰)인가 하는 것입니다.
철 지난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어 심리적 내전에 가까운 퇴행적 편 가름 속에 미움과 분노가 팽배합니다.
묻고 싶습니다.
무엇이 진보이고 무엇이 보수입니까?
무엇이 좌(左)이고 무엇이 우(右)입니까?
전체 사회의 물질적 · 제도적 기반과 괴리되는 이 정치적 심리적 대란(大亂)은 자칫하면 나라의 쇠망(衰亡)으로 이어질 위험까지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선진국에 진입했다는 21세기 한국인들의 기이한 상호 적대와 미움에서 비롯되는 현실에 아연실색(啞然失色)할 뿐입니다.
미움과 분노는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도 사회나 나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도 가장 장애가 되는 심리적 상태입니다.
미움과 분노로 새로운 세상은 절대 오지 않습니다.
논어라는 고전의 지혜를 통해서 살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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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괴(怪)력(力)난(亂)신(神)을 말하지 않습니다.
子不語怪力亂神(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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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혁명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그의 시대적 사회적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그것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는 혁명을 그의 방식으로 추구하였습니다.
‘괴력난신’을 통하지 않는 길이고, 헌 부대에 새 술을 담는 방식입니다.
‘성왕(聖王)의 치(治)’에 대한 그리움이 그의 숨겨진 혁명 의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맹자의 ‘역성(易姓)혁명’으로 나타나지만, 근대적 의미의 혁명과는 다르지요.
그러나 폭력과 난(亂)에 대해서는 기회 있을 때마다 경고하였습니다.
우리 시대야말로 문명 전환이라는 거대한 혁명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폭력이나 난(亂)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 또한 자명합니다.
그렇다면 이 혁명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공자의 다음 말을 음미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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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맹을 좋아하고 가난을 미워하면 난을 일으킨다.
불인(不仁)을 지나치게 미워하면 난을 일으킨다.
子曰 好勇疾貧 亂也 人而不仁 疾之已甚 亂也(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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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되지 않는 용(勇)과 가난이 미워함과 결합하면 어떻게 될까요?
가난을 싫어하고 부를 좋아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으로 공자도 이를 부인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것이 난(亂)으로 되는 것을 경계합니다.
난(亂)으로 끝나는 경우,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결국은 빈자(貧者) 대중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아는 것이지요.
불인(不仁)을 지나치게 미워하는 것도 난(亂)으로 된다는 통찰 또한 지금 한국의 정치 상황을 바라보는 데 대단히 현실적 의미를 갖습니다.
편을 갈라서 상대를 악마화하고 미워하다 보면 사회를 진보시키는 개혁이나 혁명이 아닌, 난(亂)으로 그치고 맙니다.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못하고 결국 함께 쇠망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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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인자(仁者)만이 능히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미워할 수 있다.”
子曰 仁者 能好人 能惡人(4/3)
“진실로 인에 뜻을 둔다면 미워함(惡)이 없다.”
子曰 苟志於仁 無惡也(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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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장(章)의 메시지가 나에게는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인간 세상에는 선악(善惡)이 존재합니다.
그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인간의 감정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선악을 판단하는 사람의 ‘자기중심성’입니다.
자신의 이익과 생각의 편향에 따라 아전인수(我田引水)로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자기중심으로 단정(斷定)하고 고정(固定)하지 않는 지적 능력’과 ‘의(義)를 끝까지 추구하고 실천하는 의지(意志)’를 결합할 수 있는 사람(仁者)이라야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시대와 사회에 따라 선악이 바뀌는 일들이 많습니다.
군주에 대한 충성이 높은 선(善)으로 추앙받던 시대도 있었지만, 지금 그런 정치를 꿈꾸거나 답습한다면 그것은 역사를 퇴행시키는 악(惡)으로 되겠지요.
적어도 선악을 판단할 때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이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첫 번째 관문입니다.
그러나 공자의 뜻이 여기서 멈추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제4장(章)을 ‘진실로 인(仁)에 뜻을 둔다면 악(惡)함이 없다’라고 밋밋하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3장의 ‘미움(惡;오)’과 다르게 읽는 것입니다.
나는 3장을 인(仁)을 향한 첫 관문으로 제시했다면 4장은 두 번째 관문으로 제시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행위는 미워하지만, 사람에 대한 미움이 없는 상태입니다.
미움이 아니라 오히려 연민(憐憫)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석가의 자비와 예수의 사랑 그리고 공자의 인(仁)을 실천하는 종교인들이 시대착오적인 적대와 증오의 악순환을 종식하는 대전환(大轉換)의 물꼬를 터주기를 바라게 됩니다만, 일부 종교인들이 오히려 편견과 미움을 증폭시키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사회정의를 위하여, 불의를 미워하고 불의에 맞서 싸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공자는 ’인(仁)을 좋아하는 것과 불인(不仁)을 미워하는 것이 같은가? ‘하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아직 진실로 인(仁)을 좋아하는 사람과 진실로 불인(不仁)을 미워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인(仁)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으나, 불인(不仁)을 미워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인(仁)을 행함에 있어서 불인(不仁)이 그 자기 몸에 붙지 않아야 한다.
子曰 我未見好仁者 惡不仁者 好仁者 無以尙之 惡不仁者 其爲仁矣 不使不仁者 加乎其身(4/6)>
인간 심리의 심층을 통찰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움에는 뭔가 자신 안에 그 대상을 품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니체도 ’괴물과 싸우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만, 엄밀하게 보면 이미 자신 안에 그 괴물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독재와 싸우면서 독재적 성격이 된다든지, 특권과 싸우면서 스스로 특권을 익히게 되는 경우를 가까운 역사에서 얼마나 많이 보고 있습니까?
물론 그 미워하는 것이 인(仁)이나 의(義)를 행하는 동력으로 이어지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그러나 불의(不義)한 부(富)와 불의(不義)한 권력을 미워하는 것만으로는 낡은 세상을 전복할 수는 있어도 새로운 세상을 열지는 못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난(亂)을 일으킬 수는 있어도 혁명(革命)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입니다.
20세기 세계사에 큰 영향을 끼친 러시아 10월 혁명과 그 후의 전개 과정도 상당히 긴 기간에 걸친 실험이었지요.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는 없지만, 자본가에 대한 적대를 이른바 과학적인 계급의식으로 고취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사회를 건설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진정으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불의한 권력이나 부(富)에 대한 미움을 넘어서 ‘부(富)나 권력 그 자체에 대한 욕망의 질이 바뀌는 의식의 진화’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잘못된 일이나 사람을 볼 때 그것을 고치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 된 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수수방관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입니다.
공자는 이미 오래전에 미움은 인(仁)을 실현하는 길이 아니라는 점을 통찰하였습니다.
인류는 오랜 역사를 통해 증오나 분노가 바탕이 되는 변혁은 결국 그 악순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는 것을 뼈아픈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알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인의(仁義)를 실현하려는 에너지’와 ‘불인(不仁)에 대한 분노나 미움’을 분리할 수 있을 만큼 여러 가지 객관적 조건들과 인지(人智)가 성숙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세계나 사회의 바람직한 변화를 바라는 것도 있지만, 한 사람의 내면 변화가 먼저라는 생각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먼저 내 마음 안에서 난(亂)이 아니라 혁명(革命)이 이루어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와 행복의 길이며, 이것이 바탕이 될 때라야 비로소 세상은 밝고 따뜻하게 바뀌어 갈 것입니다.
이남곡 - 인문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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