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오래전 필자가 미국에 있을 때 써 놓은 글인데 형님의 별세를 기해 다시 정리해 보았습니다.
형님, 최원석 회장은 불도저가 아니다.
겉으로는 대범하게 보이지만, 속으로는 정이 많은 사람이다.
나와는 나이 차이도 크고 서로 가는 길도 달라 1989년 내가 동아를 떠난 후에는 자주 만나면서 지내지는 못했다.
초등학교 2~3학년 시절이었다.
어느 날 저녁 부모님께서 같이 극장에 가자고 하셨다.
평소에 영화 보러 가신 기억이 없는데 이상하다 하면서 따라나섰다.
영화 제목이 <다시는 놓지 않으련다>였다.
어린 나이에도 상당히 멋있는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극장 문을 들어가는데 어느 키 작은 분이 나에게 다가와 이게 형님이 만든 영화라고 언뜻 말해 준 기억이 난다.
포스터 우상단에 '제작담당 최영택'이 형님의 예전 이름
영화는 멜로드라마였고 문정숙 님이 여자 주인공이었다.
영화의 끝 장면에서 남자 주인공이 문정숙 님이 탄 기차를 뛰어서 따라가는 장면이 나온 것 같다.
형님의 나이는 그때 약관, 스무 살이었다.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형님은 그렇게 일찍 영화계에 입문한 것이었다.
내가 대전에서 태어날 때, 11살이던 형님이 누님과 함께 산파를 부르러 신나게 뛰어갔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어릴 때는 형님이 내 볼에 뽀뽀하러 계속 쫓아다녀서 내가 몹시 귀찮아했던 기억도 난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형님은 곧 동아건설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다.
아버님이 건강하시고 회사가 한참 도약하고 있던 시기였다.
당시 나는 중학생이었는데 클래식 기타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었다.
나는 형님이 외국 출장을 갈 때면 스페인제 클래식 기타를 사달라고 졸랐는데 어느 날 약속대로 아주 좋은 기타를 사 와서 무척 행복했었다.
이름이 ‘호세 라미레즈(Jose Ramirez)’였던 그 기타는 다른 기타와는 비교가 안 되게 좋은 소리가 울려 나왔다.
나는 이 기타로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나 <밤과 꿈> 등을 연주했다.
기타 속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특유의 향긋한 나무 냄새가 코를 적셨다.
형님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다.
다른 사람을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하거나 부담을 주기 싫어하는 성격을 가졌다.
어쩌면 이런 성격으로 가정생활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여러 번의 풍파를 겪게 된 것이 아닌가도 생각해 본다.
형님은 내가 10여 년간 동아에서 일할 때도 나에게 야단이나 싫은 소리를 별로 못 했던 마음이 고운 사람이었다.
어느 골프장에서 1999년경
건설 회사 회장으로서 불도저처럼 마구 밀어붙이는 스타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여러 구상을 저울질한 후 확실한 계산 아래 일을 시작하는 사람이었다.
해외에서 큰 토목 공사를 많이 이끌다 보니 외부에서는 그냥 통 큰 사람으로만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동아건설이 해외 진출의 발판을 닦게 된 사우디아라비아 자동전화 확장 공사는 형님이 처음부터 수주 작전을 세밀히 세우고 추진하였다.
그 후 리비아 공사 등을 진행할 때에도 형님은 발주처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개인적이고 세세한 사항까지 직접 챙겼다.
형님은 한국 탁구 발전에도 큰 공헌을 했다.
10여 년간 대한탁구협회장으로 탁구 협회를 이끌며 한국 여자 탁구를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1973년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열린 제 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체전에서 한국 여자대표팀은 중국과 일본을 연이어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구기 종목에서 처음으로 거둔 세계대회 우승이었다.
한국 여자 탁구단은, 귀국할 때 시청에서 오픈카 퍼레이드를 할 정도로 대단한 국민적 환호를 받았다.
정현숙 이에리사 박미라 선수 (좌로부터)
형님은 어려서부터 탁구를 잘 쳤다.
전국 체전에 충남 대표 선수로 출전할 정도의 실력이었다.
그런데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탁구만 친다고 부모님이 반대하셔서 탁구를 계속 못 했다.
형님은 나중에 한국 탁구를 세계무대에서 이끌었으니, 어려서 무언가에 매진한다는 것은 얼마든지 부모의 생각과 다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학생 시절 아버님은 장충동에 집을 새로 짓기 시작하셨다.
그때 한창 탁구를 많이 쳤던 나는 3층에 탁구장을 만들자고 말씀드렸고, 그렇게 새집에는 훌륭한 탁구 시설이 갖춰지게 되었다.
나는 이에리사 선수 등을 자주 집으로 초대해 열심히 탁구를 배웠다.
당시 형님은 김혜정 님과 약수동에 살았는데 거기도 탁구 시설이 있었다.
형님과 나는 회사 소속 탁구 선수들을 불러서 함께 복식 게임을 즐기곤 했다.
형님의 특기는 전광석화 같은 파(far) 스매싱이었는데 당시 선수들에게서도 보기 힘들 정도의 실력이었다.
오른쪽 코너로 깊이 빠지면서 깔려 오는 공이라 수비하기 매우 어려웠다.
즐거운 시절이었다.
형님은 내성적이면서도 사람을 잘 사귀었고, 성품이 소탈했다.
가정 문제로 간혹 외롭고 우울해 보일 때도 있었지만, 마음이 통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집중적으로 따스한 정을 주는 성격이었다.
해외에서 공사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주하려면 발주처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한데, 이런 부분에서 형님은 뛰어난 친화력을 발휘했다.
국내 경쟁사들을 제치고 리비아 대수로 사업을 동아가 수주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단연 최원석 회장이 외교적 능력을 발휘하며 발주처의 인간적 신뢰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맛도 소탈해서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해주시던 간장 게장이나 다슬기국 등 토속 음식을 좋아했다.
이후 형님은 국내 아파트 사업과 해외 공사를 활발히 진행하며 사업을 확장하던 중, 갑자기 IMF 외환위기로 회사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참으로 어려운 세월을 지냈다.
형님은 동아를 살리려 개인 재산까지 모두 내놓고 회장직에서 물러났지만, 당시 DJ 정부의 반대로 결국 회사를 살리려는 노력은 수포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회사에 얽힌 소송 중 재판정에서 느닷없이 법정구속까지 당했다.
나중에 나에게 “영화를 만들려 하는데 제목은 ‘법정구속’으로 하려고 한다.”라는 말까지 했다.
이후 건강이 나빠져 신장 이식 수술을 받는 등 힘든 고비가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형님은 대전 공산학원을 기반으로 안성에 동아 방송대학을 만들어 키우면서 보람을 느끼고 위안을 받았다.
형님은 술 한잔하고 노래를 잘 부른다.
오래전 형님이 처음 부르는 것을 듣고 나도 당장 좋아하게 되었던 노래가 있다.
제목이 아마 <인생인가 하노라>였던 것 같다.
1절 가사는 이렇게 기억한다.
'서러워서 우는 사람 즐거워서 웃는 사람
세상에 모든 것을 알고도 모르겠네
없다고 한탄하랴 있다고 뽐낼소냐
있고도 없는 것이 인생인가 하노라‘
얼마 전 형님에게 편지를 보내며 이 노래가 생각난다고 했더니 "그래, 지금 그 노래를 내가 불러야 하는데…. 너는 <서울야곡> 부르고..."라는 답장이 왔다.
더 세월이 많이 가기 전에 형님이 부르는 '부모'라는 노래를 듣고 싶다.
어머니 생각을 하며 형님이 자주 부르던 노래였다.
사람들이 형님, 최원석 회장을 두고 ‘불도저’, ‘풍운아’ 운운하는데 그는 불도저도 풍운아도 아니었다.
사실 그는 평범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싶었던, 마음이 여리고 따스한 분이었다.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따내기 위해 발주처 사람들을 접대하며, 기흥 별장에서 같이 노래 부르던 때가 그립다.
2022 가을, 안성에서
*이 글을 정리하며 인터넷에서 찾아 보니 언급한 노래 제목은 <인생은 즐겁게>였습니다.
3절까지의 가사가 구절구절 가슴을 울립니다.
인생은 즐겁게
1
서러워서 우는 사람 즐거워서 웃는 사람
세상일 모든 것은 알고도 모르겠네
없다고 한탄하랴 있다고 뽐낼쏘냐
있고도 없는 것이 인생인가 하노라
2
잔을 들고 우는 사람 꽃을 잡고 웃는 사람
사정도 가지가지 제각기 다 다르네
꿈속에 꿈이더냐 보일 듯이 잡힐 듯이
믿고도 못 믿을 게 사랑인가 하노라
3
병이 들어 우는 사람 소리치며 웃는 사람
오늘 일 내일 일을 뉘라서 안다더냐
이것이 저것이냐 저것이 이것이냐
길고도 짧은 것이 인생인가 하노라
https://www.youtube.com/watch?v=nq1baB4EAFY&list=RDnq1baB4EAFY&start_radio=1
인생은 즐겁게 - 손시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