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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뒷사람, 김민기 선생에 대한 고마움과 아쉬움

wy 0 2024.08.15

 

김민기 사진 다운로드.jpg

김민기 1951~2024

 

김민기 선생이 전설의 뒤안길로 떠난지 한 달이 지났다.

 

김민기, 1970년대를 젊음으로 보낸 사람들에게 그는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몇 번 그를 만났으나 근래에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이번에 그를 보내면서 그를 흠모하고 추모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거의 국민적 행사를 치른 느낌이다.

 

예술인들은 물론 정치인들과 많은 시민이 그의 빈소에서 줄을 서가며 방명록에 이름을 올린 것은, 그의 음악과 그동안의 삶이 숭고하도록 진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 대한 수 많은 추모의 글에 오래된 기억의 파편들과 평소의 작은 생각이라도 보태고 싶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은 묵직함이었다.

 

과묵했으나 입을 열면 꽉 찬 저음이 묵직했고, 씩 웃는 얼굴은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의 묵직함이었다.

 

당시 필자는 김세환, 윤형주 선생 등과 친분이 있었는데 어느 날 기타를 잘 치는 친구를 같이 만나자며 소개한 사람이 김민기 선생이라 기억한다.

 

이렇게 한 두 번 같이 만난 후, 어느 날 무슨 일로 그가 우리 장충동 집에 오게 된다.

 

아마 1971년 경이었던 것 같다.

 

지하실에 방음시설을 갖춘 음악실이 있었는데, 필자의 클래식 기타를 잡고 튜닝을 몇 번 하더니 조용히 노래를 시작했다.

 

청중은 나 혼자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처음 듣는 노래인데 멜로디와 가사가 아주 잘 어울렸고, 무언가 아픔이 서려 있으면서도 후렴구에 강한 카타르시스가 있는 음악이었다.

 

노래가 끝나고 특유의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얼마 전 만든 아침이슬이라는 노래인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민기 형, 이 노래는 앞으로 많은 사람이 부를 것이오.”

 

이후에도 그는 우리 집에 와서 당시 미국의 유명 포크송 가수인 Peter Paul and Mary의 노래를 같이 들었다.

 

그는 그들의 기타를 들으면 바로 따라서 칠 수 있었고, 그들의 노래 중 ‘Don’t think twice it’s alright'이라 노래를 잘 불렀다.

  

필자의 부족한 노래를 듣고는 Jim ReevesHe will have to go가 잘 어울리니 그 곡을 부르라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그가 노래를 만들고 부르고 녹음 활동을 활발히 한 것은 이후 몇 년간 뿐이었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10여 년이 흐른 후였다.

 

필자가 객석잡지를 창간하기 직전인 1984년 초로 기억한다.

 

신라호텔 어느 식당에서 만났는데 그동안 그는 한국 민중음악의 상징으로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다.

 

본인은 전혀 원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아니라고 말하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그동안 어찌 지냈냐고 물었더니 휴전선 근처에서 농사짓고 있다며 나에게 거친 손가락을 내보였다.

 

투박한 검은 잠바를 입고 나왔는데 어느 탄광에서 일할 때 받은 대통령 하사품이라고 했다.

 

헛웃음이 나오고 마음이 찡했지만, 뭐라 위로의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잠시 침묵하자 ‘그래도 농사짓는 게 마음이 참 편하다라고 말하면서 씩 웃었다.

 

그는 결코 아침이슬이란 노래가 이렇게 알려지게 될지 상상도 하지 않았다.

 

한국의 굴곡진 현대사의 강물이 그의 노래를 불러내자, 젊은이의 뜨거운 가슴에서 절로 피어난 음악가일 뿐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 객석이라는 고전음악 월간지를 발간하려는데 이름이 어떻냐고 물었다.

 

참신하고 힘이 좋은데 좀 딱딱한 느낌이다.’라고 해서 방석 깔고 앉으면 된다.’라고 우스갯소리를 한 기억이 난다.

 

얼마 후 그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 김민기 선생도 결혼을 하네! 어떤 여자일까?’ 궁금했는데 학전에 근무하던 분으로 연극도 하는 용모와 마음씨가 고운 여성이라고 들었다.

 

이날 꼭 참석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엄청난 폭우가 와서 평창동? 예식장에 자동차 접근이 어려울 정도라는 말에 가지 못했다.

 

이후 또 세월이 지나 1993년경 김민기 선생이 폐결핵으로 몸이 안 좋다는 소식을 들었다.

 

걱정이 되어 꼭 만나고 싶었는데 병환 때문인지 다 나으면 만나자고 극구 사양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당시 그가 운영한 지 얼마 안 되는 연극 무대 학전사무실에 나의 작은 마음의 표시를 전했다.

 

그는 레코드 앨범에 사인을 하여 보내주며 최아무개는 앞으로 학전에 평생 무료 입장이라고 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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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이 앨범이 철원 국경선 평화학교의 음악감상실 철원 필하모니에 있다.

 

그로서는 파격적인 선언이었다.

 

그러나 이 무료입장 티켓을 한 번도 활용하지 못해서 송구한 마음이다.

 

이후 필자는 IMF로 어려움을 겪고 오랜 미국 생활을 했으며, 돌아와서도 그를 만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부쩍, 언제 한번 학전에 가서 김민기 선생을 만나야지, 지금도 무료로 들어갈 수 있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안타까운 부음을 들은 것이다.

 

이제 그에 대한 고마움과 아쉬움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히 해야겠다.

 

그는 한국 노래, 굳이 말하자면 민중 가요의 수준을 높이고 넓혔다.

 

그가 부르는 노래의 멜로디는 그의 음역을 따라 대부분 낮은 영역에 있지만, 작곡의 수준은 탁월하고 목소리의 울림도 감동적이다.

 

작곡한 음악의 폭이 넓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가 추구하는 영역에서(소위 포크송)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아마도 한돌 선생과 한대수 선생 정도가 버금갈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의 작사 실력이 그의 작곡 실력보다 더 좋을지도 모른다.

 

그는 탁월한 문장가다

 

아마 옛날에 태어나 벼슬을 했으면 제갈량의 출사표 못지않은 명문을 썼을 것이다.

 

아침이슬은 물론 아름다운 사람’ 아하 누가 그렇게’ ‘친구등의 가사는 어느 시인의 시 못지않다.

 

특히 아침이슬 가사는 음율과 노랫말의 조화가 거의 완벽하여 2절이 없다.

 

누구도 거기에 2절을 더할 수 없다. 김민기 본인도.

 

또 그는 수익이 되지 않는 아동극을 학전에서 계속 올렸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

 

학전이 폐관되면서 이곳이 아동과 청소년들을 위한 공연 예술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소식을 듣고 기뻤다.

 

하지만 그에게 가장 큰 고마움은, 여러모로 분열된 우리 사회가 이렇게 다 같이 추모하고 기리는 사람이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이다.

 

노랫말과 행동이 같았던 그의 삶 자체가 어쩌면 그가 이 사회에 남겨준 가장 큰 고마움일 것이다.

 

이제 김민기 선생에 대한 아쉬움을 간단히 언급하고 싶다.

 

그의 노래는 거의 20대에 다 만들어졌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이후의 작품은 몇몇 특별한 목적을 위한 노래 외에는 잘 모른다.

 

왜 노래를 더 만들고 부르지 않았을까?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유명 배우들을 배출시키며 학전을 키우고 거기서 이룬 많은 문화적, 사회적 공헌들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없지만, 그의 음악적 재능이 어려웠던 학전의 운영으로 더 만개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어쩌면 오랜 기간 당국의 감시와 탄압으로 인하여 노래 창작에 대한 열정이 식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의 노래 봉우리처럼, 자신의 음악적 봉우리에 너무 이른 나이에 올랐기 때문에 묵묵히 바다로 바다로만 내려갔는지.

 

그의 노래 봉우리에 작은 힌트가 있을지도 모른다.

 

김민기 선생의 뛰어난 예술성이, 뒷것을 자임하며 물러난 삶으로 인하여 더욱 꽃피지 못했나 하는 아쉬움이지만, 그의 삶은 그의 선택이었다.

 

그는 젊어서부터 술을 즐겼다.

 

때로는 과음을 했는데 그 깊은 속은 모르지만, 자신의 신념과 이미지를 스스로 지키기에 맨정신으로는 힘들어서였을까.

 

아마 지나친 억측일 것이다.

 

그가 이 시대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은 그의 삶의 진정성이다.

 

아주 오래전 필자를 앞에 두고 부른 노래 아침이슬은 어느 가수보다 김민기 선생이 제일 잘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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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슬을 부르는 김민기 1990년경

 

수많은 이 땅의 젊은이들이 서러움 모두 버리고 광야로 나아가, 뜨거운 태양 아래 작은 미소를 배우게 만든 노래.

 

'아침이슬'을 만들고 부른 김민기 선생님, 고맙고 미안합니다.

 

최원영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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