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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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사도신경 68 화 ★ 약자 도지용(弱者 道之用)

wy 0 2019.07.24

 

 스님에 이어 가톨릭신부를 언급한 문교수가 차분한 어조로 계속 말했다.

 

“대부분의 종교는 달을 쳐다보지 않고 끊임없이 손가락에 몰두하여 그것들을 해석해야 안심을 합니다.   

 

손가락의 모양을 따지고, 어느 손가락이 더 훌륭한지, 어느 손가락이 과연 인간을 구원하는지 논쟁을 벌이고, 그것도 모자라 다른 손가락을 찍어 버리려고 합니다.”

 

문교수의 다음 말이 단상 위의 사람들을 더욱 당혹스럽게 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빛으로 보면 모든 것이 과정이요, 손가락입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열심히 바라보는 목사, 신부님들은 물론 성경, 십자가, 여러 교리들도 한결같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제대로 보아야 할 것은 달입니다.”

 

단상에 앉아있던 총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이동구 학장이 당황한 몸짓으로 총회자의 뒤를 서둘러 따라갔고 신장로도 곧 퇴장했다.

 

장내가 잠시 웅성거렸으나 더 이상 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문교수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계속 이어나갔다.

 

“우리는 우리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릅니다.

 

‘기독’이란 말은 크라이스트, 즉 '그리스도'란 말이 한문으로 적혀진 것이지요.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종교입니다.

 

모세의 유대교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었다며, 달을 봐야 한다고, 하나님 나라의 빛을 봐야 한다고 가르치다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이 예수님이지요.

 

이후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데 그 분 자신을 달로, 신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런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 분을 잘 따르지는 않고 믿기만 하게 된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저를 비롯한 신학자들의 잘못입니다.

 

그 결과 우리가 지금 외우는 사도신경에는 예수님의 삶은 물론, 그 분의 가르침이 단 한 마디도 없습니다.”

 

방주는 사람들의 시선이 문목사에게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사도신경은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라며 그 분의 삶을 태어남에서 바로 죽음으로 연결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사도신경의 골격이 성립 된 AD3-4세기에는 이 땅에서의 삶보다 죽음 후의 영원한 삶이 지금보다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당시 로마시대에 엄청난 박해를 견디고 순교까지 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오직 내세의 희망만이,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영생을 누리고, 사자에게 몸이 찢겨 나가도 마지막 날에 몸이 다시 사는, 그러한 교리가 기독교인을 하나로 뭉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교수가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그를 바라보는 여러 눈동자들과 시선을 잠시 맞추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도신경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 자체는 아니란 것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데 인간은 오랜 시간이 걸렸고, 설령 2천년 전에는 달 같이 보였으나 지금은 손가락이라는 것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 그 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어디에도 매달리거나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교리나 에고가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중요인물이 되거나 유명해질 필요가 없으며, 큰 교회를 만드는 것이 필요치 않으며, 부자가 되거나 어디서나 우두머리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손가락을 손가락으로 알며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 보나 그 분을 형상화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예수님을 통해서 배우며 내세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이 땅 위의 생명들, 형제 자매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깊은 영성이 언제나 놓아버림과 관련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위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길게 숨을 내쉬는 사람들이 방주의 눈에 띄었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첫째 계명에도 불구하고 손가락들은 우상이 되었습니다.

 

종교는 스스로의 교리나 지도자를 우상으로 삼을 수 있는데, 예수님이 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것이 바로 그 것입니다.

 

많은 이단의 우두머리는 그렇게 해서 생기는 것이지요.

 

스스로 거룩한 삶을 살겠다는 것도 자칫 독선에 빠지지 쉽습니다. 

 

저는 오래 전 E대학 교회의 김현호 목사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 분이 아무 말씀도 안 하셨지만 저의 선생님인지 알았습니다.

 

영국의 폴 로빈슨 박사와는 한국의 기독교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면서 또한 저의 선생님인지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기에 모든 인류의 선생이십니다.

 

도덕경에 있는 ‘약자도지용’ (弱者道之用)이라는 말과 서로 통하겠지요.

 

‘약한 자가 도에 쓰임이 된다’는 뜻인데, 말하자면 어려울 때만 무슨 일을 해결 해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같이 고통받는 하나님을 가르키는 한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지고 있는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문교수가 다시 한 번 좌중을 돌아보는데 방주와 잠깐 눈이 마주친 듯했다.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선택한 자기 비움입니다.

 

바라만 보는 예수의 십자가는 내 삶이 아니지요.

 

구원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지혜입니다.

 

그 때 비로소 마태복음의 ’너희를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현재 한국 기독교인들이 가장 추종하는 절대 교리는 돈입니다.

 

진리가 아니라 자본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자본은 우리를 다시 죄인으로 만드는 새로운 신이 되었습니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우리가 우리에게 지은 죄(Debt)’가 문자 그대로 ‘부채’가 되어 이제는 사하여 줄 수 없는 죄가 되었습니다.

 

기독교를 등에 없고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종교가 탄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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