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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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소리 4 : “그렇게 매일 술을 마시니 안 돌아가실 수 있나? 아들하고 딸이 있었는데 그것도 내가 알려 줬지.”

wy 0 2020.02.06

 

 아랫집은 훤히 보였는데 윗집은 대나무 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얼핏 지붕이 보이기는 했으나 망가진 걸로 봐서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참으로 아까운 집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조금 더 올라갔다. 저만치 능선이 보이자 비로소 옛 기억이 가물거렸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할머니네 집은 능선 아래 첫 집이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왔던 길을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 보았던 집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기억 속에서는 집이 서너 채가 보이는데 지금은 두 채만 보였다. 혹시 길을 잘못 든 게 아닐까? 아니야, 산등성이가 낯설지 않은 걸 봐서는 이 부근이 틀림없다.

 

그때 문득 오동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맞다. 할머니 집 굴뚝 옆에 오동나무가 있었지. 나는 다시 내려와 오동나무가 보이는 집으로 향했다. 지붕이 망가진 집, 바로 그 집이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녹슨 양철지붕이 태풍에 떨어져나간 듯, 처마 끝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었고 부엌 옆으로 항아리가 옛날 그 모습으로 눕혀져있었다.

 

저 항아리는 개집이었는데…….’

햇살이 드나들던 방문 창호지는 여기저기 찢겨져 있고 구석구석에는 거미줄로 가득했다. 가슴이 찌르르 저려 왔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금세 망가진다는데 할머니는 어디로 가셨을까? 할머니의 소식을 알고 싶어 아랫집으로 내려갔다

 

마당에서 할아버지가 장작을 패고 있었다. 인사를 드리고 나서, 요 윗집에 사시던 할머니를 아시냐고 물으니 올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어쩌다 돌아가셨냐고 물으니 할아버지가 하는 말이 가슴을 쳤다.

 

그렇게 매일 술을 마시니 안 돌아가실 수 있나? 아들하고 딸이 있었는데 그것도 내가 알려 줬지.”

더 이상 아무 말도 묻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의 아들과 딸을 만난일은 없지만 괜히 미워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문득 할머니 방에 걸려있던 빛바랜 할아버지 사진과 가족사진이 떠올랐다.

 

허전한 마음으로 돌아서는데 자꾸만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내가 세상 밖으로 쫓겨나 적막한 벌판에 혼자 내동댕이쳐진 것 같았다. 아까 올라오다가 보았던 울퉁불퉁 굳어 버린 바퀴 자국과 여기저기 파인 웅덩이가 갑자기 할머니 마음처럼 보였다. 나의 삼 년과 할머니의 삼 년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내가 할머니를 잊고 사는 동안 할머니는 날마다 그리움을 태우다가 태운만큼 죽어갔던 것이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 오동잎 하나가 날아와 내 앞에서 스르륵 스르륵 소리를 내며 뒹굴었다. 가만히 보니 할머니 집에서 날아온 오동나무 잎이다. 내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지 오동잎이 스르륵거리며 말했다.

 

자주 오겠다고 큰소리치더니 왜 이제야 온 거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보나마나 너의 병든 햇살을 고치려고 찾아온 거겠지.”

아니야. 난 정말 할머니가 보고 싶었다구.”

 

그럼 그동안 무얼 했기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거야?”

미안해, 그건 내 잘못이야. 내가 게을러서 그런 거야.”

그래 게을렀다고 치자, 할머니 생각은 한 번이라도 해 봤어?”

미안해, 햇살은 내 오랜 동무야. 그 동무가 병이 들었어.”

그러기에 내가 자주 들르라고 했잖아.”

 

오동잎이 화를 내며 날아갔다.

오동잎이 날아가는 쪽을 바라보는데 할머니네 집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연기 속에서 할머니의 얼굴이 잠깐 보였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겨울바람이 남아있는 가을을 털어내려고 쌩쌩 소리를 질렀다. 오동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어떤 가을은 떨어지기 싫은지 몹시도 팔랑댔다

저 잎이 떨어지면 나의 햇살도 숨을 거둘 것이다. 이제 나는 햇살 없이 이 험한 세상을 혼자서 살아가야 한다. 할머니 주려고 갖고 온 배낭 속의 큰 술 두 병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할머니 죄송해요, 정말 보고 싶었어요!’

아무도 듣지 않게 속으로 말했는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발에 밟힌 마른 잎들이 바삭바삭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바짝 말라버린 내 마음도 금세 부서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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