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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음악 감상실 '필하모니'의 추억

wy 0 2018.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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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에 있는 '평안교회' 주일학교를 다녔다.

 

'참 반가운 신도여' 라는 찬송을 크리스마스 때 열심히 불렀다.

 

지금도 이 곡이 나오면 베이스 파트를 속으로 부른다.

 

그러던 어느 날 ' Peter Paul and Mary' 라는 미국 가수들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그들은 1970년대 미국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며, 평화와 자유의 메시지가 담긴 노래를 주로 불렀다.

 

피터의 가늘고 감미로운 목소리와 폴의 부드럽고 깊이 있는 목소리, 메리의 허스키한 저음이 서로 어울린 화음은 뭔가 불안하면서도 매력적이었다.

 

‘Gone the rainbow’  ‘Don't think twice, it's alright’ 등 그들의 노래를 영어로 따라 부르며 폼을 잡고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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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ter Paul and Mary 노래는 당시 김민기 님도 많이 불렀다.

 

어느 날 오후, 그는 장충동 우리 집 지하실에서 나 한사람을 앞에 두고 갑자기 내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 듣는 곡이었는데 가사와 멜로디가 서로 울림을 주며 깊은 감동이 있었다. 

 

노래를 끝낸 후 김민기 님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얼마 전에 만든 '아침 이슬' 이라는 노래요." 


김민기 님 외에도 Peter, Paul and Mary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나중에 노래 '개똥벌레' '홀로 아리랑' 등을 만든 한돌 님이었다.


한돌 님은 우리 집에 있는 그들의 판을 모두 들었고, 내가 새로운 판을 사면 꼭 들으러 왔다.

 

같이 기타를 치며 포크송을 부르던 즐거운 한 때였다.  


나는 이런 시기를 거치며 서서히 고전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첼로 음악을 좋아했는데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당장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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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후 영락교회 성가대에서 바하의 '브란덴부르크 4번'의 첼로파트를 연주했고 이후 첼로곡뿐 아니라 다른 고전 음악을 많이 듣게 되었다.

 

2-3년 열심히 레코드 판을 모으다 보니 500-600장이 되었다.

 

당시는 레코드 판을 정식으로 수입 할 수 없는 시대였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나온 원판은, 명동 암시장에서 몰래 사야 하는데, 그러다가 구속된 사람도 여러 명 있었다.

 

음질 좋은 음악을 듣고 싶은 게 죄가 되는 시절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좋은 고전 음악을 많은 사람들이 즐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침 더블 베이스를 연주하던 오랜 벗 안동혁 님이 음악 감상실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우리가 직접 음악 감상실을 차려 보자는 제안을 했다. 


종로 르네상스 감상실에서 DJ를 하던 분들과 만나 상의를 했는데, 장소만 좋으면 큰 자금 투자 없이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분들을 만나고 사업 구상을 하며 구체적으로 장소를 물색하던 중, 충무로에 있던 우리 건물 4층에 이미 고전 음악 감상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충무로는 강남이 개발 되기 전 서울 최고의 번화가 중 하나였는데 음악 감상실이 거기 있는 줄은 모르고 있었다.

 

 여기에 또 음악 감상실을 낼 수는 없었기에,  임대 기간이 끝나면 거기에  음악 감상실을 내기로 했다. 


 
레코드 판을 몇 백장 더 구입하고 음향 기기를 최고 제품으로 준비했다.

 

이름은 '필하모니(philharmony)'로 정했는데 사실 이 이름은 영어 사전에는 없는 합성어였다.

 

''이 좋아한다는 의미니까 '하모니'를 좋아한다는 뜻인데 그럴 듯한 이름이었다.

 

몇 달간의 준비를 끝내고 문을 열자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많은 손님들이 오기 시작했다.

 

자리도 좋았지만 최신 시설과 최고의 음향 설비가 음악 애호가 들의 관심을 끌었다.

 

전체 면적 120평을 음악 감상실과 휴게실로 나누어, 감상실에서는 금연을 하도록 하였고 음악도 각각 따로 들려 주었다.

 

아직 금연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에 음악을 들으며 담배를 피는 것이 멋지고 당연하다고 생각할 때였는데, 건강을 위해서는 물론이고 화재 방지 차원에서도 꼭 필요한 조치였다. 

 

휴게실은 좀 가벼운 음악 위주로 틀었고 음료수를 마시거나 대화도 할 수 있게 하였다.

 

전문적으로 음악을 듣고 싶은 사람들은 감상실을 주로 사용했고, 데이트를 하거나 책을 읽으면서 음악을 듣는 젊은 층은 휴게실을 활용했다.

 

녹음실도 DJ실 안에 같이 운영하며 음악 애호가들에게 필요한 녹음을 해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필하모니의 손님 층이 다양해졌고 반응이 대단히 좋았다

 

손님 입장에서는 표 한 장을 사서 다방 두 곳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들어오는 입장권에 음료수 표도 같이 붙여서 편리하게 티켓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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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필하모니 티켓 - '밤과 꿈의 브런치'에서 퍼온 사진

 

당시 고등학생은 원칙적으로 입장 금지였다.

 

청소년 선도 규정에 의해 빵집도 못 들어갈 때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어이 없지만 법규를 지켜야 했다.

 

하지만 사복을 입고 오는 학생들은 알면서도 들여보냈다.

 

얼굴이 동그랗고 눈이 큰 어느 여고생은 늘 혼자 사복을 입고 와서 브루흐의 '콜니드라이' 들으며 글을 썼다.

 

문학적이고 성숙한 학생들이 자주 오는 문화 공간이었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때 좋은 고전 음악을 듣는 것은 장려 해야 할 일인데 현실은 정반대였다.

 

그 때 몰래 들어오던 고등학생 중 지금 소설가나 시인이 된 사람이 많이 있다.

 

손님들이 가장 많이 신청한 곡은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모차르트 교향곡 40'  '브람스교향곡 3' '쇼팽 녹턴'  '비발디 사계등이었다.

 

 아침 10시에 문을 열어 밤 10시에 영업을 마쳤는데 마지막 곡으로는 가끔씩 파격적으로 Jim Reeves‘Am I that easy to forget’ 을 틀었다.

 

 종일 클래식만 듣다가 이 곡을 들으면 그의 매력적인 저음에 머리가 시원해 지는  느낌이었다. 

  

당시 생존했던 유명 소련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곡은 유신이 선포되며 사회 분위기가 경직 되자 들으면 안 되는 금지곡 목록에 포함되었다.

 

그의 교향곡 5번을  가끔 틀었는데 어느 날 저녁 음악을 틀자마자 누가 DJ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서 불심 검문인 줄 알고 깜짝 놀랐던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인데, 인류 문화의 발전은 그렇게 어이 없는 과정들을 거쳐야 하는 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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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하모니 감상실에서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님과 함께, 1980년경

 

필하모니는 시기적으로 유신시대의 아픔을 음악으로 달래려는 많은 젊은이들과 예술인들의 대화의 장이 되었다.

 

감상실에서 조용히 베토벤의 '전원'을 같이 듣던 20대 학생과 50대 아버지도 보기 좋은 장면이었다. 

 

자주 오시는 단골 손님이 점점 늘어나던 중 특이한 중년 신사가 있었다.

 

이분은 매일 샌드위치를 가지고 와서 휴게실에서 점심으로 먹고, 오후 6시까지 규칙적으로 음악을 듣는 고전 음악을 대단히 좋아하는 분이었다.

 

40대 중반 정도의 점잖은 분이었는데 그렇게 하기를 3~4, 주말은  빼고 매일 오는 최고의 단골손님 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일 오후 3시쯤 조용한 음악 감상실이 여자의 고성으로 시끄러워졌다.

 

남편을 수상히 여겨 몰래 뒤를 밟던 부인이 충무로의 필하모니라는 곳에서 드디어 남편을 잡아낸 것이다.

 

나중에 사연을 들으니 직장에서 퇴직을 당한 후, 집에는 차마 말을 못하고,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근무 생활을 필하모니에서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 종일 있어도 아무 말 안 하고 음료수까지 주는 곳으로는 필하모니 만한 곳이 서울에 없었다. 

 

낮에 어두운 감상실, 깊고 편안한 의자에서 음악을 들으며 숙면을 취했기 때문에, 밤에 잠을 못 자는 남편을 수상히 여긴 아내, 어느 날 남편을 미행하여 음악 감상실까지 들어간 것은 봤는데, 감상실의 실내가 어두워 남편을 찾을 수 없었다. 

 

당황한 아내가 큰소리로 남편을 불렀다. 

 

음악소리 보다 좀 더 크게!  

 

"ㅇㅇ 아버지~ "

 

음악은 베토벤 운명 1악장이 나오고 있었다.

 

 

나중에 남편의 팔을 붙잡고 나가면서, 그래도 도박을 하거나 바람을 피우기보다는 음악을 듣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소감도 주위 사람들에게 밝혔다.

 

 

이 시절 초창기부터 같이 일을 시작하며 DJ를 했던 두 분이 여러 사정으로 부득이  그만두게 되었다.

 

두 분 다 음악을 사랑하고 열심히 일한 분들이었다.

 

 

필하모니가  자리를 잡아가고 사람들이 줄을 서서 표를 사기도 했던 어느 토요일 오후 급한 전화를 받았다.

 

지금 휴게실에서 어떤 사람이 ‘시너를 바닥에 뿌리고 분신 자살을 시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 보는 젊은 사람이 작은 물통을 들고 바닥 여기 저기 조금씩 흘리는데, 석유 냄새가 나서 지금 뭐 하는거냐고 물었더니 갑자기 라이터를 켜고 "지금 여기  시너를 뿌렸다이제 분신 자살을 할거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 나갔고 파출소에 신고를 하여 경찰이 곧 출동하였다.

 

이 사람의 요구는 병무청장과 대화를 하자는 것이었다.

 

자기가 5대 독자라 군대를 안 가도 되는데 영장이 잘못 나와서 시정을 하려 해도 당국에서 아무 반응이 없어서 이런 극단적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경찰이 대화를 하며 너 댓 시간을 끌다가, 결국 젊은이를 붙잡아 사건이 종결되었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필하모니가 충무로에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유명 장소라는 말을 듣고, 여기서 소란을 피우면 방송에도 나고, 병무 청장과 대화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소란을 피웠다는 것이다

 

음악 감상실에는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열정'이 나오고 있었다.

 

분신 자살과 열정 소나타... 어쩌면 하이든의 교향곡이 더 어울렸을지도... 

 

이 후 김순 님이 실무적인 책임을 맡아 필하모니를 오랫동안  잘 운영해 주셨고 박홍 님, 권 DJ, DJ, 김DJ 등 여러 분들이 열심히 해주셔서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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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하모니 가족들

 

몇 년이 지나자 필하모니를 자주 갈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매년 크리스마스 이브는 그 곳에서 필하모니 식구들과 겨울 냉면을 먹으며 같이 보냈다.

 

필하모니는 충무로의 명소이자 유일하게 70년대 스타일을 간직하던 음악 감상실로, 10여 년을 버티다가 여러 사정으로 문을 닫게 되었다.

 

주위에 본전 다방, 풍국 제과, 준 다방, 구디구디 칵테일, 그리고 길 건너 몽셰르 통통이 있었고 육교 건너 일식당 식도원도 있었다.

 

50이 넘은 분들이 필하모니에서 고전 음악을 들으며, 청춘의 한 때를 보냈다는 말을 가끔 들으면 마음이 흐뭇해진다. 

 

당시 어두컴컴한 감상실에서, 베토벤의 ‘전원을 아들과 같이 옆자리에서 듣던 50대의 아버지보다 나이를 더 먹은 지금, 나는 카라얀의 브람스 교향곡 4번을 눈을 감고 듣는다.

 

필하모니 감상실의 등받이 높은 의자에 깊숙이 파묻혀 듣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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